박종화 소개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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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화의 자서전

 

지은이: 박종화

 

박종화의 출생지
나는 1967년 부산시 영도구 청학동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장소는 아버지가 버섯재배를 위해, 영도 청학동 골짜기를 물색해서 산 곳이다. 자기 고향인 경북 청도군 화양읍의 땅을 팔아서 샀었던 부산 서면에 갖고 있던 땅을 팔아서 생긴 돈으로 산 땅이었다.


나의 엄가가 아버지와 동향인 청도로부터 시집 왔을 때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그 청학동 골짜기엔 전기도 없었다고 한다. 모두가 못사는 곳이었다. 그 당시에는 영도에서도 가장 산으로 많이 올라간 곳 중의 하나였단다. 엄마가 처음으로 시집을 왔을때, 아버지가 일부러, 청학동 근처의 최악의 판자집을 몇 곳이나 들러서 엄마가 가난한 사람들 사는 것에 경악을 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사는 골짜기를 보여줬단다. 너무 충격을 받을까봐 미리 가장 못사는 판자집들을 보여줬단다. 엄마는 아버지가 쑥 들어간 몇개의 전형적인 부산 영도의 오두막 같은 판자집을 보고는 가슴이 내려앉았단다. 

장마와 홍수의 기억
내가 태어난 다음해인 1968년에 큰 홍수가 져서 골짜기 앞의 또랑(천)이 크게 범람했다. 그때 나는 겨우 걸을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그때의 지속된 장마비와 많은 물을 기억한다. 어릴때부터, 나는 비를 아주 좋아하는데, 장마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양철 슬라브 지붕이라서, 비가 오면, 비때리는 소리를 아기때 부터 들어서 그런지, 그 소리에 잠을 잘자고 매우 행복한 기분을 지금도 느낀다. 해마다 비가오거나 하면, 집 뒷쪽의 비탈의 흙들이 내려와서 탱자나무 울타리나 집을 덮쳤다. 엄마말로는, 2살정도 밖에 안된 내가, 엄마가 무너져내린 흙을 혼자 여자몸으로 치우려고하니까, 여자인 엄마는 그런것하면 안된다고 단호히 말리더란다. 그런것은 아저씨들이 하는 것이라고. 그 말을 듣고 엄마가 깜짝 놀랐단다. 나는 장마 비만 오면, 앞 또랑의 물이 넘치고, 뒷 비탈의 흙이 내려오는 것이 재미있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배 기술자로 상선고등학교를 나와서 버섯을 재배하려고 영도 청학동에 땅을 사 들어왔는데, 닭을 조금기르고, 배만드는 조선공사에서 일을 했다. 나중에는 월급이 많은 선원이 되어 내가 1살 이후부터는 계속 외국으로 배를 타고 돌아다녔다. 

엄마
나의 누나는 2살이 많고 여동생은 1살이 적었다. 엄마는 그 시대의 여자들이 그랬던 것 처럼 많은 고생을 했고,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고 자기 밥도 아껴야했다. 영양이 부족해 내 여동생이 태어났을때는 젖이 나오지 않아서 우유를 먹일수 밖에 없었고, 여동생이 어릴 때 비교적 튼튼하지 못한 것도 먹는 것 자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마음씨 좋고 협조적인 사람이었다. 남의 일에 간섭을 하거나 해을 끼치는 일을 못했다. 나를 매우 존중했고, 내가 무엇을 하든지 도와주고 혼자 일을 처리하도록 해줬다. 엄나는 나를 특별히 대했는데, 어릴적부터 내가 매우 어른다웠단다. 아기몸속에 영감이 들어않았었단다. 내가 만으로 1살 반이 되었을때, 내 여동생이 태어났는데, 그 전에는 항상 엄마 앞쪽 품에서 잠을 잤는데, 엄마가 갓난아기인 내 동생과 같이 자던 첫날, 엄마를 뿌리치고는 엄마의 등쪽으로 가서 눞더란다. 엄마는 새로 태어난 아기를 앞에서 데리고 자야한다는 뜻이었단다. 엄마는 그런 내가 고마웠다는 듯이 몇번 그 말을 했다.

비오비타사건

내가 3-4살이 되자, 없는 살림에도, 엄마는 내게 영양제로, 원기소인지 비오비타인지를 하루에 몇알씩 줬는데, 나는 그것들을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가끔 몇알을 더 달라고 하면 엄마가 몇개씩을 더 주곤 했다. 그런데, 이웃의 내또래의 삼수(3-4살 정도, 나보다 1살위)가 찾아와서 놀다가 유리병으로 된 비오비타를 둘이 꺼내 먹게 되었다. 비오비타는 장롱위의 높은 곳에 있어서 의자를 놓아 서야 했다. 그런데, 실수로 병을 잡다 놓쳐서 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이 나고 영양제들이 흩어졌다. 겁을 먹은 삼수에게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돌려보냈다. 나는 약간 걱정이 되었는데, 혼자 노느라고,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나중에 엄마가 와서 깨진 것을 보고는 야단은 커녕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내게 영양제를 더 주었다 (먹고싶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심부름

엄마는 네게 흔히 애들에게 시키는 심부름을 거의 시키지 않았는데, 꼭 그래야할 정도로 바쁘면 미안해 하면서 혹시 그러고 싶으냐고 공손히 의향을 떠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자발적으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엄마때문에  한 기억이 평생에 없다. 
 


태어난 집에 관해
나는 그 골짜기에서 어릴쩍 저녘마다 찾아오는 부엉이, 집의 경사진 곳에 낮은 나무에 둥지를 튼 삼광조, 집의 큰 나무에 둥지를 튼 때까치와 같이 자라났다. 

할매와 삼촌
할매는 집안의 조그만 밭을 일궜고, 아버지는 예술적인 취미가 많아서 정원을 손수 만들고 나무 심는것을 좋아햇다. 삼촌은 건달끼가 있었고 노름과 술을 좋아했다. 할매는 엄마를 매우 구박했다. 이웃사람들도 모두 엄마를 매우 동정했다. 엄마의 시집살이 만큼 힘든 것도 없었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시어머니에게 시달렸다. 내가 어릴때, 할매가 엄마를 탱자나무 가시 덤불로 떠 밀기도 했고, 도끼를 휘둘면서 쫒아와서 나와 여동생, 엄마가 구석방으로 도망쳐서 문고리를 꼭붇잡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 도끼로 문을 내리쳐서 나중에 나가보니, 커다란 구멍이 생긴것을 확인한 적도 있었다. 

할매는 남편인 할아버지가 약 40세 정도에 죽자 그 이후 아버지(자식들) 때문에 재혼을 못했다고 하면서 매우 불행한 삶을 스스로 살았다. 7남매인가의 외동딸로 공주처럼 자랐는데, 시집후 생활이 그 전과 같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엄마를 괴롭혔는데, 할매가 죽는 날 할매를 위해서 가장 슬프고 많이 울어준 사람은 나의 엄마였다. 할매가 교통사고 때문에 거동을 못한 이후 죽기전'까지 엄마는 자신을 말할수 없을 정도로 구박한 할매를 지극히 보살폈다. 
 

할매와 나

할매는 소문난 욕쟁이에다 다른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였다. 그리고, 다른 손자손녀들에게 매우 심하게 대했다. 잔소리도 많이하고, 좋아해주지도 않았다. 나중에 자라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할매는 나와, 나의 누나인 옥경이, 여동생인 미경이를 칭찬을 많이 하고,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단다. 할매는 단 한번도 나를 야단치거나 싫을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나의 엄마에게 괴퍅하게 굴어도 내가 있으면 자제했었고, 나는 잘 대해주었다. 사실 나는 어느 정도 클때까지 할매가 엄마나,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잘 몰랐다.


삼촌의 죽음

유일한 나의 삼촌은 내가 영국 애버딘대학교에 가서 공부할때, 알콜 중독으로 객사 했다. 노가다와 조선소 일꾼로 전전하면서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삼촌은 한국사회에서 종종 볼수 있는 실패한 혹은 희생된 한 전형이었다. 삼촌의 죽음과 관련하여 특이한 것은 삼촌이 죽던 날 나는 저녘에 기숙사방에서 매우 특별한 슬픔을 느꼈고, 평소에는 생각을 전혀하지 않던 삼촌을 꿈에서 봤다. 그리고 다음날 내 여동생이 자기가 결혼한다고 한국에서 전화가 왔는데, 그때 통화 종반에 삼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인생에서, 몇번 예지적인 꿈을 꾼 적이 있는데, 삼촌의 경우가 그랬다. 

삼촌은 나의 아버지의 유일한 남자형제였다. 삼촌은 성격이 아버지처럼 강인하지 못하고 따뜻한 반면에 철없는 식이었다. 목소리가 아주 좋아서 노래를 잘불렀단다. 내가 태어났을때, 아버지는 외국에 있었는데, 삼촌이 무스마를 얻게 되어서 나를 보고 무척 좋아했단다. 그 이후 나는 삼촌한테서 한번도 싫은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나를 무척이나 좋하하고 사랑을 가지고 대해주었다.
 

놀기
주로 혼자서 동식물과 놀기를 좋아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들어가지 전까지 하는 것이라고는 매일 근처 산을 돌아다니면서 개구리 메뚜기 잡는 것이 일과 였다. 글자도 몰랐고,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8살(만 7세) 학교에 갔을때는 엄마와 할매가 사이가 안좋아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한 뒤였다. 학교를 싫어했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다가 빨리 집으로 돌아와 책가방을 던져놓고 놀기에 바빴다.

국민학교
국민학교때 처음 시험을 쳤을때 그것이 무엇인지 왜하는 것인지 몰랐는데, 유치한 문제들의 답을 적어내고 다음날 점수를 받았는데, 한 문제인가 틀렸다. 내용은 사과 몇개를 더하면 몇개가 되는가하는 식의 이상한(웃기는) 질문들이었다. 그런에 놀랍게도, 70명이나 되는 학급의 다른 친구들이 대부분 그 시험지의 답들을 다 맞추지 못하고 내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거나, 2등정도였거나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선생도 나를 약간 다르게 대하는 것도 느껴졌다. 그전에는 가난하고 잘 할것이 없어 보이는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때 청학국민학교 교문을 나오면서, 생생하게 느낀 것은 내가 내자신을 생각하는 것과 평가를 통해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생각할 때 엄청난 차이가 날수도 있기 때문에 나 스스로든 타인이든 평가할 때 매우 신중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학급 친구들이 자신들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학급 친구들에게는 간단한 배울 필요도 없는 직관적인 문제도 어려울수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 숙제

나는 학교에서 숙제를 해가는 경우가 드물어서 자주 손들고 벌서고, 무릎꿇고 않거나, 매를 맞았다. 벌 받을때는 왜 숙제를 안했나 후회가 됐지만, 집에가면 하고 싶은 놀이나, 만들기, 동식물 쫒아다니기등으로 도저희 숙제할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그 전날 가져갔던 책가방을 다음날 급하게 그대로 들고다녔기 때문에 자주 옆 친구의 책을 같이 봐야했다. 남에게 빌려달라는 것을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나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대개 학급 친구들은 나를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애들 괴롭히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보자고 하면 좋아했다. 그래도, 나는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말을 하기가 싫어서, 책없이 가만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짝쿵이 같이 보자고 해서 보는 경우도 많았다. 

학교시험
국민학교, 중학교 2학년때까지, 시험준비는 항상 벼략치기였다. 그러나, 수업시간에는 선생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질문에 답을 하고 질문도 많이했다. 어차피 50분동안 잡혀서 아무것도 못랄 바에야, 수업들어보는 것이 좋았고, 나는 수업이면 수업을 당연히 들어야한다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은 목적의식이 있었다. 이것은 엄마와 아버지가 어릴때부터 항상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을 내게 보여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터득 된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
2-3학년때인가 자연이란 과목을 배웠는데, 적성에 맞았다. 재미있고, 그것이 내가 갈길임을 깨달았다. 그 이후 세부 내용을 바뀌어도, 그런 종류의 것을 할것이란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국민학교 2학년때, 나는 과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중학교
중학교 2학년때, 담임선생이 반장을 시켜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사양했다. 왜냐하면, 학급반장이면 선생이나 학교에 와이로(뇌물)주고 학급에서 편애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는 그런 부조리를 국민학교 1학년때부터 싫어했다. 그래서, 국민학교 1학년 선생이 나를 특별히 더 신경써주는 것등도 싫었다. 그래서 항상 선생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또, 나는 어떤 공식적인 자리나 '장' 자리 같은 것을 하는 것이 싫었다. 왜냐하면, 그런것을 할때, 꼭 본연의 모습과는 다른 연극/연출을 어린이들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와 사회가 그런 연출을 하도록 강요하는 문화가 어릴때부터 나와 안맞았다. 그런 것이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상하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중학교 담임선생은 의지가 확고 했다. 결국에는 엄마와 아버지와도 연관되었고, 억지로 급장이 되게 되었다. 나는 나의 원칙과 기호에 맞는 일을 억지로 하는게 싫어서, 결국에는 선생과 부모에게 고의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수준까지 되었다. 

학교, 부모, 그리고 혼자
중학교 2학년 반장사건을 경험으로 나는 학교와 사회에서 결국 나의 인생을 책임질 사람을 나 자신임을 알았다. 그 이후, 모든 의사결정을 독자적으로 모든 책임을 내가 질것을 각오하고 살게 되었다. 

다른 우주
나는 중학교 2학년때, 내 인생의 그 이전까지의 사고나 생각의 체계는 비효율적이고, 일관성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완전히 새로이 가치관과 생각의 체계를 재건축하기로 마음먹었다. 단어하나 하나의 개념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내가 검증하고 나의 사고체계의 건축 자재(벽돌)로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새로운 우주와 자신을 만들기 시작했다.

목적에 맞는 행동
벼락치기와 같은 외부 세상을 위해 나 자신을 강요하는 행위는 자존심 상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학습의 순수 목적에 어긋난다. 그래서, 중학교 이후, 순수 목적을 우선하고, 그 목적에 맞는 행동을 스스로 결정해서 하게 됐다. 시험의 원래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자신의 학습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하는 것이므로, 그 목적에 맞게, 벼락치기나, 시험을 위한 공부는 하지 않았다. 그러자, 60-70명되는 학급에서 평소 10등 안에는 들던 등수가 34 등인가로 추락했다. 그 등수를 본 순간 나는 행복했고, 새로운 나의 인생의 시작임을 깨달았다. 나무나 밝고, 정직하고, 강력한 미래가 보였다. 학교 입학후 잃어버린 배움에서의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인문계 고등학교
중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즐겁고 내가 하고 싶은 동물학과 수의학을 할수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실업계를 가지않고 인문계로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실업계로 가서 기술자가 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 했었다.

고등학교
고등학교에서 나는 3 사람의 좋은 선생을 만났다. 그 외에도 좋은 선생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세계관과 맞는 열정과 자존심, 독립적인 사고를 하는 선생들도 있었던 것이었다. 수학, 물리학, 지구과학이 특히 좋았는데, 모든 공부를 자발적으로 했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열심히 듣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었고 시험 성적도 잘 나왔다. 고등학교때에도, 전혀 시험공부를 하지 않았다. 항상 교과사나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즐겼고 그것들이 무엇을 말하는가 그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 종종 친구들로부터, 내일을 수학시험인데 왜 계속 영어책만 읽고 있냐는 말을 들었다. 또, 교과서 외에 많은 책들을 읽었다. 내가 주로 읽은 책들은 철학, 수학, 문학, 고전들, 교육학, 컴퓨터프로그래밍들이었다.

죽움의 딜레마
사춘기때의 나의 문제는 공부가 너무 재미있고 하고 싶은 연구가 너무나 많은데, 인생이 100년 밖에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나는 수학자도 되어야 했고, 생물학자도 되어야 했고, 프로그래머가 되어야 했다. 애완동물점을 운영하고 싶었고, 비행기도 취미로 설계하고 있었고, 승마 기수가 되는 것도 꿈이었다. 문제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먼저 노화현상을 완벽히 이해하고, 그것을 멈추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원래 동물학/수의학을 하고 싶어했던 내 생각과도 맞았다. 
그런데, 또 한가지 문제는, 생물학도 너무나 방대해서, 한가지 연구만을 하는데도 인생을 다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 엄청난 기대로 세상에 출연한 컴퓨터를 이용해서, 연구를 자동으로, 초 대량으로 생명현상과 노화현상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내가 컴퓨터를 한대사서 중독이 되어서 밤낮 프로그래밍을 했던 것과도 맞았다. 나는 생명현상이 정보처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누구한테서 들었는지 내가 스스로 생각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 이후, 계속해서 이러한 방향의 철학을 만들고 있고, 현재는 이것을 생학(biosophy)라고 한다. 그 당시 어디선가 인간의 게놈에 관한 것을 읽었다. 컴퓨터를 통한 생물학의 분석이 DNA(게놈)을 완벽하게 이해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대학교
서울대학교 수의학과에 반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을 했는데, 매우 실망했다. 교수나 학생들의 순수한 학문에 대한 열정도 없다고 느꼇고, 데모를 해도, 이기적인 이유에 의해서, 깊은 생각없이 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파악됐다. 순수함과 깊은 의식없는 학문과 행동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 부패가 너무나 심했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 두기로 했다. 전문대학에서 기술을 배우고, 내가 하고 싶었던 동물관련일, 책읽는 일들을 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그래서, 엄마에게 휴학을 통보하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 뒤 부모가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해서, 정신과 행동이 부패하지 않은 곳을 찾아 공부를 원없이 하기로 결심했다.


군대
그러나, 1980년대 중반에 유학을 군제대 없이 가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제대를 위한 휴학으로 입영을 기다렸다가 1988년 1월 19일 입대했다. 행정병으로 하루 평균 4-5시간만 자고 20시간씩 일을 했다. 점호후 잠자리에 눕는 순간 1초 이내 골아 떨어셔, 순간적으로 깨면, 다음날이거나 야간보초 나갈 시간었다. 훈련소에서 부터 영어공부를 하고, 군대 30개월 제대 할때까지 영어공부를 많이 했다. 엄마가 2번 면회를 왔는데, 그때, 모두 그 시간에 몇시간동안 엄마 앞에서 영어사전으로 면회실에서 공부를 했다. 논산훈련소에서는 50분 훈련 후 10분 쉴 때 여자친구가 보내준 리더스 다이제스트 영문페이지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읽었다. 그 종이는 끝내 완전히 걸레가 되어서 버려질때까지 잃는 식이었다.


군대구타사건

내가 1988년 1월 19일 훈련소에 들어간 순간부터 구타를 당했다. 훈련소에서 지속적으로 구타가 있었다. 군대가 좋아서 구타가 없다고 했으나, 누구나 다 아는 거짓이고, 그런 거짓, 위선, 부정부패가 내가 본 군대의 진실된 모습이었다. 훈련소에서 지속적으로 구타를 서면으로 고발했고, 그 때문에, 혹은 나때문에 훈련소에 긴장이 팽배했다. 논산에서 충남 연기군에 있는 자대에 배치되는 열차에서도 구타를 당했다. 육체적으로 심한건 아니지만, 정신적 상처는 항상 심하다. 자대 배치 첫날밤 모욕적인 구타를 당했는데, 그 다음날이 중대장(조대위)와의 정식 면담이었다. 면담때, 중대장에게, 훈련소에서부터 자대까지의 구타에 대해 말을 했다.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정확히 말을 했다. 취지는 구타도 없고 규정에 맞게 일이 돌아가는 군대라고 하면서 구타를 자행하는 문제가 있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암묵적으로, 그런 것을 정정하란 것이었다. 군대를 가본 사람이면, 중대장이 부대에서 어떤 존재이고 그 때의 상황은 자살을 선언하는 것과 같은 것이란 것을 안다. 특히 조대위는 차갑고, 무섭고 독해서 부대원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날, 중대는 완전히 발칵 뒤집혔고, 그 부대 사상 처음으로 최고상병이 2주간 완전군장으로 매일 몇시간씩 "구타를 하지맙시다"라고 구보를 해야했다. 곧 부대에서 나는 들어온 첫날부터 맞아 죽게 된 상황이었다. 그렇게 나의 길고(30개월) 살벌한 군대 생활은 시작됐다.그리고, 중대장을 비롯하여 다른 고참들 또한 살벌한 군대생활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병이 완전히 미쳤거나 목숨걸고 원칙대로 하라고 협박을 한것으로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존댓말사건

나는 제대하는 순간까지 규정을 숙지하고 준수하려고 노력했다. 그중의 하나로, 제대할때까지 모든 하급 군인들에게도 존댓말을 썼다. 어느날 내가 병장으로 위병초소장을 하고 있을때, 위병을 서고 있던 이등병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을 보고, 외부 부대의 대위가 내가 왜 박병장은 하급 뵹사에게 존댓말을 쓰는가하고 놀라서 물었다. 그래서, 육군규정에 상급자는 하급자를 존중하도록 되어었다고 답을 했다. 그 장교는 충격을 받은 듯이 보였다.실제로, 육규에, 상급자가 건방지게 하급자에게 반말쓰라는 규정은 없다.
 

유학
군대에서 영국 케임브리지에 지원했는데 지원시기를 놓쳐 다음해에 지원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다음해에 유명한 대학에 가느니, 조용한 곳에서 빨리 공부를 하기로 하고, 스코틀랜드대학들에 지원을 했다. 모두 합격통지서가 왔는데, 이것은 고등학교 성적과 내가 수의학과에 입학했었던 것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추측된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는 수의학과가 가장 들어가기 어려운(의대보다도 더) 학과였기 때문이다. 영국의 수의학과를 들어가고 싶었으나 학비가 자연대의 두배였다. 그래서, 애버딘(Aberdeen)대학의 동물학과에 합격해서, 제대 후 1개월후 영국행 비행기를 22시간을 타고 갔다 (싼 간접항로로 가는 영국항공편을 탔기 때문이다). 비행기에 있는 동안 나는 생애 가장 최고의 경험중의 한때를 가졌다. 영국항공의 승무원들이 나를 잘 대해 주었다.
 
영국 애버딘
영국애버딘은 나에게는 배움의 천국이었다. 4년간의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생산적인 시기였다. 나보다 더 많이 열정적으로 공부를 한 사람이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동물학에서 3학년때 생화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4년만에 졸업했다. 공부 방식은 강의가 끝나고 나면 도서관에서 계속 연구논문을 줄줄이 읽는 것이었다. 

DNA 3차원 모델
1학년 분자생물학 강의시간에 Willliam Long이라는 교수가 DNA는 2중나선이라고 강의를 했다. 고등학교때에도 그렇게 배웠으나, 어떻게 2중나선이 풀어지고 엮어지고를 반복하며 복제를 하는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의후 연단에 내려가서 왜 그것이 가능한지 왜 2중나선인지를 설명해달라고 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설명을 해줬으나, 나는 이해를 못했다. 그래서 계속 곰곰히 생각해 보았으나, 2중나선이 아닐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교과서를 봐도 시원하게 설명이 안됐다. 그래서 그후 분자생물학관련 교수들을 직접 찾아가서 제데로 된 모델을 보여주고 설명을 해달라고 했으나, 아무나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에는 생화학과 학과장인 Hamilton교수에게 가서야 만족스런 답을 얻었다. 왜냐하면, 그는 박사학위를 DNA구조에 관한 것으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계속해서 에너지적으로 어떻게 DNA가 이중나선이어야 하는지 의문이 증폭되어, Fothergill 교수에게 가서 3차원 CPK모델을 사용한 모델링과 컴퓨터를 이용한 모사와 시각화를 하게 해달라고 했다. 결국 나는 나만의 DNA구조 모델을 만들었는데, 사다리형 DNA모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에 대한 모델링 연구결과를 네치져지에 3학년때 보냈다. 10여일만에 거절 당했으나, 계속해서 DNA 구조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때 수많은 DNA구조 관련 논문을 읽었다. 왓슨 크릭의 1953년 논문 이전에도 나선형 DNA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DNA구조에는 너무나 많은 이론과 연구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통해 과학연구가 어떻게 진행되는가에 대한 매우 큰 학습을 했다.

아론 클룩
아론 클룩이란 사람이 네이쳐라는 잡지에 글을 썼는데 DNA구조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그 사람에게 편지를 하나 썼다. 편지를 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케임브리지의 MRC 센터라는 곳의 소장이었다. 그사람이 내 편지를 보고, open day라른 것이 있는데 내려와 보라고 했다. 그래서 케임브리지에 내려가니 면접을 보는 것이었다. 그때, MRC센터가 바로 DNA의 구조를 밝혀낸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케임브리지에 가서 확실히 DNA구조에 대해 연구해 보기로 결심을 했다. 

영국 케임브리지
3차원 구조학을 할수 도 있었는데, 내가 외국인이기에 장학금이 없어서 탈락되었다. 또, 3학년까지의 나의 대학교 시험성적이 최고가 아니였기에, 입학이 쉽지 않아 보였다. 나의 지도교수였던 앤 글로버는 나에게, 시험공부를 해서 좋은 성적을 얻으라고 권했으나, 나는 처음에 거절했다. 그러나, 결국, 앤의 노력에 감화되어 최고의 성적을 거두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결과 애버딘 대학의 생화학과를 1등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졸업 성적이 최소한 2.1등급 이상이 되어야 박사를 할수 있는데, 나는 1등급을 받았고 케임브리지에서 생명정보학을 전공할 수 있게 됐다. 

팀 허버드
팀은 나의 지도교수였는데, 나보다 4살 많은 젋은 사람이었고, 내가 그의 첫 박사학생이었다. 진보적이고 지성적이며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부인이 일본여자였다. 내가 내려가던 해 케이라는 아들을 하나 나았다. 팀은 내가 세계 최초로 시작한 바이오펄의 기초를 제공한 사람이었다.

싸이러스 초씨아
싸이러스는 나의 생정보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바이오펄(BioPerl)

바이오펄은 내가 개시한 최초의 국제적 프로젝트이다. 케임브리지에서 바이오펄 코드를 만들어서 모든 생명정보학자가 공유하도록 하는 개방형소스 프로젝트였는데, 성공하여 이제는 생명정보학에서 매우 큰 국제 프로젝트가 되어있다. 이때부터, 인터넷을 활용한 활동에 관심이 매우 깊어졌다.


 

인터넷

케임브리지의 키즈 대학(케임브리지는 31개의 대학들로 구성된 종합대학이다)에서, 나는 기숙사의 방에서 인터넷을 서비스 했다. 아마 생물학 분야에서는 몇몇 안되는 개인 웹서비스 제공자였을 것이다. 그때, 인터넷의 향후 미래에 대한 많은 비젼을 만들었는데, 현재 세상을 내가 예측한 데로 대체로 돌아가고 있다. 그때, 인터넷상에서 존재하는 국가, 철학, 생활공간, 인터넷상의 부동산, 인테넷상의 네트워크 기반의 많은 아이디어들이 생겼다. 
 


생명 가상 세계
 

그것의 결과로, 현재 2000여개의 인터넷 도메인을 확보하고 이것을 통해 생명지식 가상세계를 구축할 계획이다. 인터넷이 생김으로해서, 인간은 가상과 현실의 차이가 줄고, 가상의 온라인 생활이 더욱 더 중요해지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더 접근한 세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은 정보처리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 하바드 의대 유전학과
하바드 의대 유전학과에 1998년 1월 부터 조지 처치랩에서 포닥(박사후 연구원)을 했다. 그곳에서 DNA칩을 연구했다.

영국 EBI 
1999년 4월 미국이 싫어져서 영국으로 다시 옮겼다. 영국에서는 Liisa Holm이라는 여자 그룹리더의 연구실에 들어갔다.

영국 MRC centre, MRC-DUNN 
2001년 케임브리지의 MRC centre의 노벨상 수상자인 존 워커로부터 생정보학 및 단백체학 그룹을 이끌어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생물학 연구소의 그룹리더가 되었다. 취직관련하여서는 더 이상 올라갈수 없는 자리에 까지 올라간 것이다. 나는 그런 자리에는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룹리더직 이후 집을 샀다. 그리고 2년뒤, 영년직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노무현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조국에 큰일을 할수 있다고 느껴서 한국 카이스트에 부교수로 가게되었다.

카이스트
2002에서 2003년경 원래 영국에서 미국으로 가서 좀더 큰 규모의 랩을 갖고자 했는데, 마침 카이스트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여러가지 좋은 조건을 약속받고 왔으나, 한국에 와서 보니 실상은 달랐다. 실망을 많이 했다. 근본적으로 교수들이 지성인으로서의 기본 원칙과 순수한 학자로서의 요건이 부족한데서 생기는 많은 보이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존댓말 사용 운동 
 

카이스트에서 했던 한 사회 프로젝트는, 교수나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앞으로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이 정보소통의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 영어를 공용어로 쓰던지, 모두가 서로 존댓말을 쓰던지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국가유전체정보센터
2005년 국가유전체정보센터의 김상수 박사가 대학교로 이직하면서, 센터장직에 갈수 있게 되었다. 카이스트보다도 더 큰 일을 내 방식데로 할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한국에서 공적인 자리로서는 나에게 가장 맞는 직책이었다.

국가생물자원정보관리센터
국가유전체정보센터가 2006년 3월31일 국가생물자원정보관리센터로 확대 개편 되었다.
 


생정보학센터

 

생정보학센터는 내가 1996년에 세운 인터넷상의 센터이다. 개방형무료 면허를 사용하는 센터로서, 누구나 가입할수 있고 탈퇴할수 있다. 이 센터는 바이오라이센스를 사용한다(http://biolicense.org).